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문단 편집) === 서독 연방총리(1963~1966)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undesarchiv_B_145_Bild-F004204-0003%2C_Ludwig_Erhard_mit_seinem_Buch.jpg|width=300&height=400]] 그는 '''Wohlstand für Alle'''(모두를 위한 번영)이란 슬로건을 내세우며 독일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오죽하면 [[독일 사회민주당|사회민주당]]이 1959년 [[고데스베르크 강령]]을 통해서 100년 가까이 당의 강령으로 삼아온 [[마르크스주의]]를 포기하고, [[사회적 시장경제]]를 인정하기로 결정했을 정도였다. 당시 사회민주당이 [[공산주의]]를 지향했던 것은 결코 아니었지만, 부분적인 계획경제, 즉 [[민주사회주의| 민주적 사회주의]]를 고집하면서 노동자 계급을 위하는 계급정당으로 남았던 반면, 기독교민주연합은 [[사회적 시장경제]]를 내세우는 국민정당으로서 높은 지지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국민들의 높은 기대 속에 총리 자리에 오른 에르하르트의 집권기는 그다지 순탄하지 못했다. 취임 직후 경제 침체기가 오면서 경제부 장관으로 그가 누렸던 인기는 싸늘하게 식어버렸고, 외교 문제에 당내 장악력까지 불안하다보니 불과 3년만에 그는 총리직에서 내려와야만 했다. 그가 총리로서 단명했던 이유는 크게 분류하자면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대통령보다 훨씬 강한 여당 내부 장악력을 가질 필요성을 요구받는 게 내각책임제의 총리 자리이지만 그는 당내 기반이 그리 튼튼하지 않았다. [[아데나워]]는 총리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여전히 [[기민당]]의 대표였고 그를 낙마시키기 위해 집요하게 노력했다. 그리고 2007년에야 밝혀진 사실이지만 '''그는 기민당의 당원조차 아니었다.[[https://www.welt.de/politik/article834316/Der-Kanzler-der-nie-Mitglied-seiner-Partei-war.html|#]]''' 심지어 아데나워와 사이가 크게 나빠지기 전에는 아데나워가 집요하리만치 입당을 권유했지만 그것도 모두 물리쳤다고 한다. 대체 왜 그가 기민당에 입당하지 않았는지는 본인이 밝히지 않고 사망한 이 시점에서 영원한 미스테리이긴 하지만, 대다수 역사학자나 정치학자들의 추정은 그의 비정치적 성향 탓으로 보고 있다. 이런 비정치적인 성향은 총리직을 수행하는 기간 내내 그를 괴롭혔다. 한 언론인은 그의 재임기간을 회상하면서 '''"정치가 성품에 해롭다는 것이 일반적인 통념이지만, 그는 반대로 성품이 정치에 해로움을 끼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을 정도였다. 두번째로는 외교문제를 들 수가 있다. 이 당시 미국은 [[베트남 전쟁]]으로 인해 그 위신이 상당히 떨어진 상태였고, 유럽에서는 우리만의 마이 웨이를 가자는 [[드골주의]]가 떠오르고 있었다.[* 전임 총리인 아데나워 역시 독일 내에서는 가장 대표적인 드골주의자였다.] 하지만 에르하르트는 '''[[대서양주의]]'''라고 불리던 그의 친미 행보를 꿋꿋이 이어나갔다. 당연히 이는 많은 반발, 특히 아데나워가 여전히 장악하고 있던 여당 기민당 내에서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거기다 그가 그토록 믿었던 미국마저 그에게 일종의(?) 배신을 저지르고 말았다. 이 시기 미국은 치솟는 베트남 전쟁의 비용으로 인해 독일에 머무르던 자국군 주둔 비용을 독일에게 많이 전가시키고자 했다. --아니 내가 어떻게 니들을 대했는데-- --트럼프가 처음이 아니었다-- 당연히 독일은 난색을 표했고, 에르하르트는 [[린든 B. 존슨]]과의 정상회담자리에서 자신의 의견을 존슨에게 설명하려고 했다. 하지만 ~~안 그래도 성질 더러운데다가~~ 막장으로 치달은 베트남 전쟁으로 인해 내외부의 비판에 시달리고 있던 존슨에게서 에르하르트는 그만하라는 일종의 역정 비슷한 호통을 듣고 [[데꿀멍]]하고 만다. 마지막, 그리고 결정적으로 에르하르트의 발목을 잡은 것은 바로 아이러니하게도 '''[[경제]] 문제'''였다. 이 시기에 접어들면서 독일의 경제성장률은 한 자릿수 후반대에서 초반대로 떨어졌고, 반대로 실업률은 0%에서 2~3%로 오르기 시작했던 것. 지금에야 이런 게 고도성장기가 끝나면 당연히 발생하는 현상으로 받아들여졌겠지만 그 당시만 해도 독일 내부의 반응은 '''"으악! 다시 공황이 시작되나보다!"''' 정도의 히스테리였다.[* 사실 [[독일]]이라는 나라가 1차 대전 직후의 [[초인플레이션]]과 1930년대의 [[대공황]]이란 엄청난 경제위기를 두 번이나 겪었고, 그 결과 [[나치당]]이 힘을 얻어 2차대전을 일으켜 나라가 두 토막 난 상황이었으니, 지금까지의 호황에 흐뭇해하던 독일 국민들 입장에서는 트라우마가 다시 살아날 만했다.] 게다가 지금도 일시적인 사이클일 수 있다고 이해한다 정도지 이런 경제 지표 악화는 당연히 결코 정권에 좋은 상황이 아니다. 그리고 마침내 1966년 약간의 불경기와 더불어 예산부족문제가 발생하자 에르하르트는 증세를 결정하였다. 하지만 이와 같은 그의 결정에 반발하여 당시 연정을 이루고 있던 [[자유민주당(독일)|자민당]] 소속의 장관들이 모두 사임을 하였고, 기민당과 자민당의 연정은 붕괴에 이르고 말았다. 결국 12월 1일 에르하르트는 총리직에서의 사임을 발표했고, 그의 후임자로 [[쿠르트 키징어]]가 [[독일 사회민주당|사민당]]과의 대연정을 구성하면서 총리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